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자의 옥 (문단 편집) === 명사안(明史案)-명사집략 사건(1662~1663년) === [[명나라]]는 다른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자체적으로 체계적인 역사기록을 남겼는데,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멸망하자 [[숭정제]] 연간이 미완성인 채로 남았다. 당시 편찬을 담당했던 주국정(朱國楨, 1557 ~ 1632)이란 신료는 미완성인 기록들을 가지고 강남으로 피난가서 살다 죽었는데, 그의 후손이 궁핍해지자 이를 지방 유력가인 장정롱(莊廷鑨, 1585 ~ 1655)에게 팔았다. 장정롱은 이 《명사》를 완성해 자신의 가문을 그냥 돈 좀 있는 유력가가 아니라 학식과 덕망을 갖춘 명망가로 발전시켜 명성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장정롱은 초기 작업 중에 급사하고 동생 장정월(莊廷鉞)이 이 작업을 마무리했는데, 문제는 이런 일을 하기에는 장정월의 학식이 모자랐다. 이 때문에 장정월은 주변의 여러 학자들과 명사들을 초빙해서 서문과 평론을 달고 미완인 부분을 보충했는데, 이게 화근이 되었다. 장정월이 초빙한 학자와 명사들은 하나같이 학식과 명성이 드높았지만 동시에 청나라에 이를 부득부득 가는 반청주의자들이었다. 초빙 제안을 받은 이들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의뢰받은 《명사》 편찬 작업에서 명나라에 대한 찬양 일색에 청나라를 깎아내리는 내용으로 가득한 내용을 적었고, 장정월은 이 책들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그저 빨리 이것들을 팔아서 명성도 올리고 돈도 벌자는 생각으로 책을 출간했다. 이렇게 출간된 《명사집략》(明史輯略)에는 청나라 조정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연실색을 넘어 분노할 내용들로 가득 찼다. 우선 청 황제들을 묘호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고[* [[피휘]] 항목 참조. 현대 한국에서도 부모님 이름을 그냥 부르지 않고 무슨 자, 무슨 무슨 자 하면서 높이는 예절에도 피휘의 관습이 남았다. [[유교]] 사회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예의로, 과거에는 왕이나 황제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썼단 이유로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 왕조가 망했을 때만 군주의 이름자를 부르거나 글로 써도 상관이 없었다. 청나라가 한족 왕조 못지않게 피휘 문제에 민감했음은 청나라에서 만주족 고유의 전통과 [[몽골인|몽골족]]으로부터 유입된 [[티베트 불교]] 못지않게, 한족으로부터 유입된 유교 또한 매우 중시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유교를 천대한 몽골족의 [[원나라]]가 기록 문화에 관심이 적었던 관계로 피휘 문제에 둔감하여 한족 왕조나 청나라와 달리 문자의 옥이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청의 정통성을 부정했으며, 명과 청의 전투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명의 연호를 쓰고, 후금/청군을 반란군으로 적었으며, 항장 출신들인 상가희와 경정충을 나라 팔아먹은 도둑놈이라 비난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한 장씨 일족은 지방 관아에 막대한 뇌물을 주어 문제되는 내용을 삭제 혹은 수정하고 재출간하는 선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이 때 장정월과 사적으로 갈등을 빚던 오지영(吳之榮)이라는 사람이 이것을 호주지부(湖州知府)인 진영명(陳永命)에게 고발하면서 사건이 터졌다. 그러나 진영명은 이미 장정월과 장정롱의 아버지인 장윤성(莊允誠)에게 뇌물을 받았기에 심리를 거부했고, 이에 오지영은 지속적으로 고발을 하여 사건을 퍼트리려 했고 결국 북경의 조정에까지 이 소식이 들어갔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는 [[강희제]]였지만 이 사건이 알려졌을 땐 나이가 8살이라 국사는 [[허서리 소닌]], [[구왈기야 오보이]] 등 조정 대신들이 대신 통치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오보이 등은 즉시 이 사건의 수사를 명령했다. 그 결과 이미 죽은 장정롱은 [[부관참시]]를 당했고 장정월 등 장씨 일족도 능지처참을 당하였으며, 북경에 끌려서 고문을 받던 도중 옥사한 장윤성도 사후 부관참시되었다. 이 외에도 편찬에 참여한 이영석(李令皙), 주우명(朱佑明), 모원명(茅元銘), 모차래(茅次萊), 장인징(蔣麟徵), 당원루(唐元樓), 오지명(吳之銘), 오지용(吳之熔) 등의 학사 및 명사들도 본인은 능지처참당하고 가족과 친척, 제자들까지 싸그리 다 처형당했다. 처형당한 장씨 집안의 가산은 고발한 오지영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정작 이 인물도 사건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도 않은 1665년에 감기 열병에 시달리다 죽었다고 한다.] 뇌물을 받고 이 사건을 무마하려 한 진영명도 부관참시[* 사건이 터지자 도주했지만 얼마 못 가 여관에서 스스로 목을 메어 죽었다.]당했고, 진영명의 동생인 강보현 지현 진영뢰(陳永賴)도 처형당했다. 뿐만 아니라 뇌물을 받고 책의 개정 출간을 허용한 지방 관리들, 심지어 단순히 책을 인쇄한 사람과 책을 받아 시장에서 판매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처형당했다. 본격적인 문자의 옥을 시작하는 신호탄격인 사건이었지만 《명사집략》은 워낙 반청기조가 강했던 책이기에 그나마 다른 필화에 비하면 나름 명분이 있었다. 더욱이 이 당시만 해도 [[남명]]과 [[동녕 왕국]]이 있었기에 시기상 민감한 사안일 수밖에 없었다. [[김용(1924)|김용]]의 조상인 사계좌(查繼佐)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무죄로 방면됐다. 김용의 《[[녹정기]]》서장에 이 《명사집략》 사건 이야기가 소설적인 각색이 더해져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초기의 중원문화사 판본에서는 이 부분이 누락되었지만 이후에 나온 해적판과 2020년에 나온 [[김영사]] 정식판본에는 모두 수록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